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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P의 역사 – 확고한 기업 철학의 성공 사례

게사장(crabbyreview) 2021. 2. 11.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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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실리콘 밸리의 신화적인 기업이라 하면 애플이나 마이크로소프트가 떠오르죠. 하지만 HP가 이 두 기업보다 먼저 실리콘 밸리의 기반을 닦은 회사라는 점을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국내에서 HP는 그냥 “프린터 회사”, 혹은 “마이너 노트북 제조사” 정도로만 알려져 있는데, 알고 보면 HP의 역사는 194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될 정도로 유서 깊은 기업입니다. 특히 HP는 직원 복지, 수평적인 조직 구조와 같은 현대적인 경영 철학을 정립한 기업이기 때문에 HP의 성장 스토리를 통해서 배울 점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HP가 완벽한 기업이라는 소리는 아니지만, 이번 IT 스토리 포스트를 통해서 HP라는 기업에 대해 객관적인 평가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하네요.

 


[ 목차 ]

 

1. 데이브와 빌

2. The HP Way

3. 암울했던 2000년대

4. 현재의 HP

 


[ 1. 데이브와 빌 ]

 

HP도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처럼 아무런 자본 없는 두 젊은이가 오로지 열정만으로 설립한 스타트업 회사였습니다. HP는 모두 알다시피 Hewlett & Packard의 약자인데, 이는 바로 HP의 설립자 두 명의 성을 따서 붙인 이름이죠.

 

 

스탠퍼드의 전기공학도였던 데이브와 빌은 그들만의 사업을 꾸리는 것이 꿈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졸업했던 1935년은 미국의 경제 대공황이 드리우고 있던 시기여서 창업을 위환 환경도, 자본도 확보하기 힘들었죠. 그래서 결국 그들은 1938년에 수중에 있던 자금 538달러를 털어서 Palo Alto 지역의 작은 차고를 임대해서 창업을 하게 됩니다.

 

 

재미있는 점은, 이 둘은 회사 이름을 만들 때 누구 이름을 먼저 넣을지를 결정하기 위해 동전을 던져서 결정했다고 하네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팩커드-휴렛”은 회사 이름으로는 너무 어색한 느낌이라 빌 휴렛이 이 내기를 이긴 게 정말 다행이었지 않나 싶습니다.

 

거의 무자본에 가까울 정도의 창업이었기 대문에 데이브와 빌은 초창기에 지방 분해용 전기 충격기, 악기 튜닝 기계, 화장실 소변기 세척 센서 등, 돈이 될만한 물건은 무엇이든 다 만들어내서 팔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HP가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계기는 월트 디즈니가 “판타지아” 애니메이션에 사용된 음악의 음역대를 검증하는 용도로 HP의 발진기(오실레이터)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습니다. 당시 경쟁사들보다 우월한 성능, 저렴한 가격, 그리고 판타지아의 성공으로 인해 HP의 브랜드 가치가 높아지기 시작했죠.

 

판타지아를 못 보신 분이라면 디즈니가 유튜브에 무료로 공개했으니 한번 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세계 최초의 오케스트라 뮤직비디오(?) 같은 작품입니다.

 

 

이후 HP는 1960년대부터 전자 계산기와 컴퓨터 디스플레이 시장을, 1980년대부터는 프린터 시장을 장악하기 시작합니다. 실제로 의료 업계에서는 아직도 HP 디스플레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네요.

 

 

특히 초반에 개인용 컴퓨터(PC) 시장을 등한시한 대가로 실리콘 밸리의 초창기 기업임에도 불구하고 90년대 까지는 컴퓨터 시장에서 존재감이 작은 편이었습니다.

 

HP의 초창기 시절 성공했던 제품들이 대부분 기업 고객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 그리고 PC 시장에 뒤늦게 뛰어들었다는 점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HP라는 브랜드가 개인 소비자들에게는 조금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 2. The HP Way ]

 

데이브와 빌은 HP를 경영할 때 확고한 철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요즘에는 당연하게 느껴지지만, 1950~60년대에는 상상하기도 힘들었던 성과급, 탄력 근무 제도, 의료비 지원과 같은 현대적인 복지 시스템과 직급을 따지지 않는 수평적인 소통 문화도 HP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합니다.

 

당시에는 이러한 경영 방식이 워낙에 독특해서 “The HP Way”라는 이름까지 붙일 정도로 당시 HP 직원들의 자랑거리였다고 하네요.

 

 

데이브와 빌의 대인배적인 기질은 당시 HP의 채용공고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창업을 하기 전에 HP에서 경험을 쌓고 가세요! 단, 한번 들어오면 떠나기 싫어질 수도 있습니다”라는 도발적인 문구로 유능한 인재들을 많이 모을 수 있었습니다.

 

 

이때 채용했던 인재 중 한 명이 바로 그 유명한 스티브 워즈니악입니다. HP의 꽉 막힌 기업 구조 때문에 퇴사하고 애플을 공동창업했다는 일반적인 믿음과 달리, 워즈니악은 HP에 대해 남다른 애정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스티브 잡스와 함께 애플 2를 개발할 때에도 HP에서 일하고 있었고, 해당 프로젝트만 끝나면 계속해서 HP에서 일할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애플이 외부 투자금을 받기 시작하면서 워즈니악의 소속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자 결국 그는 어쩔 수 없이 퇴사를 결정하게 됩니다.

 

이는 저 혼자만의 추측이 아니라 워즈니악이 인터뷰를 통해 직접적으로 언급한 사항입니다. 자막은 없지만 하단의 영상에서 2분 28초부터 보시면 본인이 HP의 퇴사를 원하지 않았었다고 말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HP의 수평적인 기업문화에 대한 재미있는 예시를 하나 들어볼까요? 데이브가 회사에서 개발 중인 제품을 확인하는 과정 중에 다목적 디스플레이가 시장성이 없다고 판단해서 프로젝트 취소를 지시했는데, 해당 프로젝트 담당자가 이를 무시하고 끝까지 개발을 마무리했습니다.

 

이 제품은 결국 미국의 아폴로 프로젝트에 사용하게 되면서 닐 암스트롱이 달에 착륙하는 장면을 담아낸 제품이 됐죠. 데이브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해당 직원에게 사과하면서 “불복종의 표창”이라는 상장을 하사했다고 합니다.

 

 

정말 유능한 인재들에게는 단순 복지나 연봉보다도 “내가 하는 일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라는 목표의식과 성취감을 부여하는 근무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었습니다. (열정페이 하라는 소리는 아닙니다.)

 

물론 돈도 중요하겠지만 직장에서 내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사람처럼 느껴지고, 내가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이 중요하게 여겨진다는 느낌만큼 보람찬 일이 없지 않을까요?

 


[ 3. 암울했던 2000년대 ]

 

2000년대 초반은 HP의 암흑기입니다. 물론 당시에는 미국의 닷컴 버블 붕괴 시기여서 모든 IT 기업들이 힘들어했던 시기였다는 점을 감안해야겠지만, HP의 경우는 1999년부터 CEO를 맡았던 칼리 피오리나(Carley Fiorina)의 잘못도 크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위에 언급했다시피, HP는 특유의 결속력과 내부 직원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대부분의 CEO가 HP 출신이었습니다. 하지만 HP에도 변화의 바람이 필요하다는 의견으로 인해 1999년에는 미국의 대형 통신 기업인 AT&T에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던 피오리나를 CEO로 영입하게 됩니다.

 

 

하지만 피오리나는 이 “혁신”이라는 주문을 너무 과도하게 의식한 탓인지 HP가 비교적 등한시하고 있던 PC 사업으로의 무리한 진출을 시도합니다. 당시 미국 PC 시장은 IBM, Dell(델), Compaq(컴팩)의 3강 구조였는데, 피오리나는 그중 하나인 Compaq의 인수 합병을 강력 추진하게 된 거죠.

 

 

마이크로소프트의 노키아 합병, 야후의 텀블러 합병과 같이 뚜렷한 비전 없이 단순한 시장 점유율 확보를 위한 대규모 인수 합병의 결과가 대부분 좋지 않듯이, HP 역시 Compaq와의 합병으로 인해 큰 홍역을 치르게 됩니다.

 

당시에 빌 휴렛의 아들인 월터 휴렛이 이 합병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했었기 때문에 HP는 창사 이래 처음으로 대규모 파벌 싸움이 벌어지게 되고 과거에 전래가 없던 대규모 해고, 성과급 제도 철폐와 같은 결정으로 인해 수십 년 동안 지켜왔던 “HP Way”가 크게 흔들리는 계기가 됐습니다.

 

피오리나가 CEO 취임했을 당시 HP의 총 직원 수는 약 8만 명이었는데, 그녀가 2005년에 사임할 때까지 해고한 직원의 수가 무려 3만 명에 달했다고 하는군요. 이렇게 큰 희생을 치르면서 새로운 사업 분야를 개척하기 시작했으면 당연히 성과가 나야 하는데, HP의 PC 사업부는 영업이익률 1%도 찍기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피오리나에 대한 대내외적인 비난의 목소리가 거세지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전 HP의 PC 시장 진입에 대해서는 찬성하는 입장입니다만 피오리나의 경우는 너무 성과 보여주기에 성급해서 무리한 방법을 택했다는 것이 가장 큰 패착이 아닌가 싶네요. 과도한 효율 위주의 경영을 추구하는 과정 중에 HP의 경영 이념과 극심하게 대립했다는 점도 문제였고요.

 

 

결국 피오리나는 2005년에 강제로 CEO 자리에서 사퇴하게 됩니다. 이후에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와 경쟁하는 등 정치적인 활동을 시도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고 하는군요.

 

물론 저도 수평적인 기존 HP의 경영 방식이 100% 옳다고 말할 생각은 없습니다. 개인에 대한 존중이 과해지면 조직에서 불필요한 무임승차자도 분명 발생하기 마련이니까요. 하지만 일개 월급쟁이인 제 입장에서는 HP와 같은 인간적인 경영 방식을 택하는 기업들이 성공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은 어쩔 수 없군요.

 


[ 4. 현재의 HP ]

 

피오리나 이후에도 HP는 PDA 시장에 대한 집착, 그리고 아이폰의 등장 이후에 독자적인 모바일 OS인 webOS의 실패로 인해 개인 소비자 시장에서는 존재감이 사라지다시피 했습니다. 주력 사업 분야인 기업용 장비 및 서비스 부문에서는 여전히 수익성이 좋았지만 이마저도 캐논, 엡손의 거센 도전으로 조금씩 입지가 위태해지고 있었죠.

 

 

결국 개인 소비자 시장도 포기할 수 없다고 판단한 HP는 결국 2014년에 개인용, 기업용 시장을 별도로 관리할 2개의 회사로 기업을 분할하게 됩니다. 현재 HP Inc는 기존의 PC, 노트북, 프린터 사업을 담당하고 HP Enterprise는 기업용 서버, 클라우드, 소프트웨어 솔루션을 담당하고 있다고 하네요.

 

현재 우리에게 노트북을 친숙한 HP는 일반 소비자용 장비를 담당하는 HP Inc입니다. 이 분할 과정 중에 기업 로고에도 큰 변화가 있었는데, 기존의 딱딱하고 정직한 이미지에서 보다 세련되고 감각적인 로고로 바뀌게 됐죠. 전 개인적으로 새 HP의 로고를 좋아합니다.

 

 

실제로 출시한 노트북들의 디자인만 봐도 2015년을 기점으로 HP의 제품들이 훨씬 세련된 느낌이 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HP 홍보용 멘트 같지만 사실입니다.) 저도 HP의 대대적인 리브랜딩 이후부터 스펙터 시리즈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을 정도니까요.

 

 

마침내 고리타분한 기업용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의 이미지를 벗은 HP는 최근에 이미지 개선으로 인해 다시 주식 시장에서도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최근에 개인 소비자 시장이냐, 기업용 시장이냐를 두고 갈팡질팡하고 있는 델(Dell)은 결국 기업용 시장을 택하면서 기존의 XPS, 에일리언웨어 시리즈에 대해 소홀히 하는 모습을 보여줘서 매우 안타깝습니다. 개인적으로 델도 HP처럼 다시 분발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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