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씽크패드 X1 나노 리뷰를 하다 보니 문득 씽크패드 시리즈에 대한 여러 생각이 떠오르게 되더라고요. 사실 저는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오로지 데스크탑 PC를 신봉하던 사용자이기 때문에 IBM 시절의 씽크패드를 다양하게 사용해본 경험은 없습니다. 그래도 최근에 나름 다양한 종류의 씽크패드를 사용해보기도 했고, 개인적인 관심 때문에 조사했던 내용이 많아서 한번쯤은 다뤄보고 싶었어요.
그러면 최대한 지루한 내용은 빼고 과거 출시 제품을 나열하면서 씽크패드가 왜 IBM에서 레노버로 넘어가게 됐는지에 대해서 간단히 한번 알아보도록 할까요?
[ 목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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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대용 PC의 등장 ]
1980년대는 x86 프로세서와 마이크로소프트 DOS 운영체제의 대성공 덕분에 IBM이 개인 PC 시장을 꽉 잡고 있던 시기입니다. 그런데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에 갑자기 휴대용 PC라는 개념이 새로 생겨나면서 도시바와 컴팩(Compaq)이 IBM의 점유율을 야금야금 갉아먹기 시작했죠. 물론 지금 그 시절 "휴대용" PC들을 보면 사실상 차에 싣고 다닐 수 있는 수준이지, 절대 현대 노트북처럼 가볍게 가방에 넣고 다닐만한 물건은 아니었지만요...
어찌 됐건 컴팩은 포터블 시리즈에 이어서 어느 정도 현대 노트북과 비슷(?!)하게 생긴 SLT 시리즈로 시장에서 큰 인기를 끌게 됩니다. 이에 IBM도 질세라 PS2 L40 모델을 출시했지만 이미 시장의 선점효과를 빼앗긴 상태여서 아류작 취급만 받고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합니다.
사실 당시 기준으로 IBM PS2 L40 모델이 제법 잘 만들어진 제품이라고는 해요. 다만 "휴대용 PC는 컴팩이 최고"라는 이미지를 깨지 못했던 탓이 컸던 것이었겠죠. 그래서 IBM은 휴대용 PC 시장에 진입하기 위해 아예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게 되는데, 그게 바로 오늘의 주제인 "IBM 씽크패드"입니다.
여담으로 씽크패드라는 이름은 기존에 IBM이 만들었던 태블릿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던 모양이지만요. 당시 IBM의 사내 모토가 "Think!" 여서 그런지 그 ThinkPad 모델명을 계속 이어나가고 싶었나 보네요. (노트북에 어울리지 않는 Pad 이름이 들어간 이유)
[ 씽크패드의 성공 ]
최초의 씽크패드는 1992년에 출시됐습니다. 저가형 씽크패드 300과 고급형 씽크패드 700으로 나눠지는데, 우리가 오늘 익히 알고 있은 "씽크패드"의 정체성을 확립해준 제품이 바로 씽크패드 700 모델입니다. (300번대는 별 특징이 없어서 잊혀진...)
당시 씽크패드 700 시리즈가 시장에서 혁신적인 제품이라고 평가받을 수 있는 요소를 크게 눠서 보면 :
1) 확실한 디자인 / 브랜드 아이덴티티
2) 입력장치 (키보드 & 트랙포인트)
3) 우수한 설계와 내구성
정도로 요약할 수 있는데, 각 포인트에 대해서 나눠서 얘기해보도록 하죠.
1) 확실한 디자인 / 브랜드 아이덴티티
1980~90년대에는 대부분의 IT 제품들이 오래 사용하면 노란색/베이지색으로 변색되는 하얀 플라스틱 재질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비단 노트북뿐만 아니라 데스크탑 PC, 키보드, 마우스 등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이 같은 재질이었죠. 그런 와중에 검은색 씽크패드 노트북은 당시 기준으로는 정말 "섹시"하기 그지없는 디자인이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IBM이 당시에 일반적인 하얀색 플라스틱에 "PS2 L50"과 같은 모델명으로 노트북을 출시했다면 주목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 검은색 바디에 빨간색 포인트 색상은 레노버가 씽크패드를 생산하고 있는 오늘날까지도 브랜드의 정체성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트렌드가 빠르게 변화하는 IT 시장에서 28년 넘게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성공한 브랜딩이라고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2) 입력장치
IBM은 씽크패드를 만들기 전부터 키보드를 잘 만들기로 유명했습니다. 기존 데스크탑 PC 키보드인 모델 M 시리즈는 아직도 80년대에 생산됐던 오리지널 제품이 키보드 마니아들 사이에서 고가로 거래가 될 정도죠. 이런 IBM의 키보드 기술력 덕분에 씽크패드 시리즈도 당시 노트북 중에서 유난히 키감이 좋고 튼튼하기로 유명했습니다. 90년대 후반부터는 씽크패드 키보드 제작을 Lexmark, NMB와 같은 외부 업체가 담당하게 됐지만, 밀접하게 기술 이식을 받아서인지 품질에는 문제없었다고 하네요.
↓ (클릭) 씽크패드 키보드에 대한 TMI 정보
- 마이크로소프트 파노스 파나이는 NMB 출신
마이크로소프트 서피스 시리즈의 총책임자인 파노스 파나이는 원래 NMB의 기계 장치 부서(주로 키보드)에서 근무했던 경력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서피스 시리즈가 유난히 키감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더군요.
씽크패드 시리즈의 트레이드마크 중 하나인 트랙포인트(빨콩)는 1992년에 씽크패드 700 모델이 출시될 당시만 하더라도 혁신적인 입력장치였습니다. 그 시대의 노트북들은 별도의 마우스 연결 없이 커서를 조작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죠. 물론 터치형 트랙패드가 개발된 오늘날에는 트랙포인트 조작이 불편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여전히 해당 기능을 찾는 마니아층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장갑을 수시로 착용해야 되는 직업군은 아무래도 터치형 트랙패드보다는 여전히 트랙포인트가 조작하기 간편하다는 점도 있고요.
3) 우수한 설계와 내구성
초창기 씽크패드 모델들의 설계는 외계인 기술력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널리 인정받았습니다. 튼튼하고, 주변기기 호환성 좋고, 조작하기 편한 7열 키보드 등, 당시 씽크패드 시리즈의 차별점을 나열하자면 무수히 많죠. 특히 1994년부터 미국 NASA의 우주 프로젝트에 씽크패드가 대규모로 채용되면서 "신뢰성"의 대명사가 됐고요. 오늘날에도 씽크패드 시리즈는 이런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고급 제품군에는 의례적으로 밀스펙 인증을 받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유독 IBM 씽크패드 시리즈가 이런 기술력을 확보할 수 있었을까요? 그건 IBM 시절 씽크패드의 연구와 개발을 담당했던 일본의 야마토 연구소 덕분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야마토 연구소의 개발 역사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글이 너무 길어지니... 간단히 말해서 90년대 일본 제조업 특유의 고집스러울 정도의 깐깐함과 장인 정신이 빛을 발했던 시기였다고만 해두겠습니다.
저는 레노버가 노트북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 중 하나가 야마토 연구소의 노트북 관련 원천기술을 물려받았기 때문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실제로 오늘날 생산되는 씽크패드도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을 더 품질이 좋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니까요.
[ 씽크패드의 암흑기 ]
황금기를 보냈던 90년대와는 달리 씽크패드 시리즈는 2000년대부터는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노트북이라는 물건은 돈 많은 기업이나 연구기관에서 사용하는 비싼 장비라는 인식이 강했죠. 그렇기 때문에 노트북의 가격도 매우 비쌌습니다.
그런데 점차 노트북이 일반 소비자들이 사용하는 IT기기의 영역으로 진입하면서 노트북의 평균 가격이 점점 떨어지고, 씽크패드 시리즈의 수익성이 급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애플의 아이북 시리즈가 노트북 시장에서 대히트를 치면서 일반 소비자들에게서 씽크패드는 점점 멀어져 가게 됐죠.
여담이지만, (故) 스티브 잡스가 애플에서 쫓겨나서 NEXT를 설립했을 당시 애플에 대한 반발감 때문인지 씽크패드 560 모델을 사용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해당 모델은 "스티브 잡스 씽크패드"로도 유명합니다. 초창기 아이북의 디자인도 씽크패드 560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는 루머도 있지만 이건 공식적으로 확인할 길은 없고요.
여기에 추가로 1999~2001년 사이의 닷컴 버블 붕괴 때문에 전반적인 IT 시장 자체가 위축되어 버립니다. 기존의 씽크패드 시리즈의 프리미엄 전략이 더 이상 먹히지 않게 되어버린 거죠. 이후에 IBM은 2004년에 중국의 레노버에게 PC 사업부를 매각하기 전까지 몇몇 실험적인 씽크패드를 생산했지만, 일부 마니아층을 제외하면 큰 인기를 얻는데 실패합니다.
[ 레노버에서의 씽크패드 ]
레노버가 IBM PC 사업부를 인수한 후 씽크패드 시리즈의 원가절감과 가격 인하에 집중하게 됩니다. 이걸 단순히 "중국식 후려치기" 전략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레노버는 당장 씽크패드 시리즈의 수익성 개선과 기존 소비자들의 높은 기대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난처한 상황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레노버 선택한 전략은 "씽크패드 시리즈의 세분화"였습니다 :
1) 품질은 조금 떨어지지만 가격이 비교적 저렴한 SL 시리즈
2) 휴대성에 집중한 T 시리즈
3) 프리미엄 X 시리즈
4) 전문 워크스테이션 용도의 W 시리즈로
W시리즈가 P시리즈로 통합되거나 저가형 제품군이 E와 L 시리즈로 나눠졌다는 소소한 차이점을 제외하면 이 모델명 부여 방식을 오늘날까지 동일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러모로 IBM 시절만큼 혁신적인 기술력을 선도하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레노버의 운영 하에 씽크패드 시리즈는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가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2007~2008년에 미국발 금융위기가 닥치면서 씽크패드 시리즈는 또다시 고급형 X, W 시리즈 때문에 발목이 잡으면서 적자 구조로 전환을 하게 돼버렸죠. 특히 기업용 비즈니스 노트북 판매량에 크게 의존하는 씽크패드 시리즈 특성상 이 금융위기는 레노버에게 더욱 큰 악재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이후의 행보에 대해서는 각 시리즈의 개발 과정을 들여다보면서 얘기해보도록 하죠.
1) 씽크패드의 핵심 모델 : T 시리즈의 변화
2) 가성비를 앞세운 L 시리즈와 Edge 시리즈의 탄생
3) 프리미엄을 향한 재도전 : X1 시리즈
4) 워크스테이션 시장에 재진입 : P 시리즈
1) 씽크패드의 핵심 모델 : T 시리즈의 변화
2008년 이후 레노버는 씽크패드 중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T 시리즈에 집중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씽크패드 T시리즈에 얇은 펜타그래프식 키보드가 도입이 되면서 기존 마니아들 사이에서 큰 반발을 사기도 했죠. 하지만 굳이 씽크패드가 아니더라도 당시 노트북은 두께를 줄이기 위해 얇은 펜타그래프 키보드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던 시기여서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합리적인 결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펜타그래프 방식이라고는 해도 씽크패드의 키보드는 경쟁 노트북보다 키압, 반발력, 키캡 품질 측면에서 월등히 앞선 수준이어서 여전히 키보드 방면에서는 여전히 호평을 받았죠. 노트북을 대량으로 구매하는 기업이나 일반적인 개인 소비자 입장에서 씽크패드 T 시리즈는 딱 적당한 가격 대비 품질 균형을 이뤄내면서 다시금 인기를 얻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절의 기억 때문에 아직도 "씽크패드의 근본은 T 시리즈다"라고 하는 사용자도 있을 정도죠.
2) 가성비를 앞세운 L 시리즈와 Edge 시리즈의 탄생
T시리즈의 개발과 함께 레노버는 보다 저렴한 L 시리즈(기존 SL 시리즈)에도 많은 투자를 하게 됩니다. 재질이나 디스플레이와 같은 외부적인 요소에서 원가절감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기존에 씽크패드가 비싸서 구매할 엄두를 내지 못하던 일반 사용자들이 저렴한 가격에 상위 T시리즈와 유사한 감성을 느낄 수 있는 선택지가 됐던 것이죠.
여기에 추가로 레노버는 Edge 13이라는 보다 저렴한 파생형 모델을 내놨는데, 검은색 디자인을 제외하면 전혀 씽크패드 같은 면모가 없어서 그다지 인기를 끌지 못했습니다. 현재는 이 Edge 모델이 씽크패드 E시리즈로 개량돼서 가성비 노트북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있지만요.
3) 프리미엄을 향한 재도전 : X1 시리즈
레노버가 아무리 가성비 좋은 씽크패드를 만들어내도 기존의 프리미엄 이미지 유지를 하지 못한다면 결국 씽크패드 브랜드의 가치는 하락할 수밖에 없었겠죠. 그래서 L 시리즈와 T 시리즈로 어느 정도 안정궤도로 진입한 레노버는 다시 프리미엄급 씽크패드에 도전을 하게 됩니다.
기존의 프리미엄 제품군이던 X 시리즈 중에서도 으뜸이라는 의미를 담아(?!)서 X1이라는 새로운 시리즈를 만들면서까지 말이죠. (현재도 X1과 X 시리즈는 가격이나 품질 차이가 있습니다.) 2011년에 출시된 초기 X1 모델은 기존 T 시리즈에 비해 특출 난 장점도 없고 괜히 내구성 강조하느라 반사가 심한 고릴라 글라스 유리를 써서 썩 평이 좋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그 후에 나온 X1 카본 시리즈는 씽크패드 특유의 뛰어난 확장성을 유지하면서 카본 섬유 소재로 경량화에 성공하면서 큰 인기를 얻게 됩니다. X1 카본 시리즈의 성공으로 씽크패드는 다시금 "프리미엄 비즈니스 노트북"의 지위를 회복하게 됐고, 여전히 널리 사랑받고 있습니다. (2021년 기준으로는 9세대 씽크패드 X1 카본 모델이 최신형)
4) 워크스테이션 시장에 재진입 : P 시리즈
2015년 전후로 노트북의 평균 성능이 빠르게 향상되면서 3D 그래픽, 영상 편집, 도면 설계와 같은 전문직 분야에서도 노트북의 수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레노버도 씽크패드 W시리즈의 컨셉을 계승한 P시리즈로 크리에이터, 혹은 워크스테이션 분야로 확장을 시도하게 됐죠.
아직은 일반 소비자에게 씽크패드 P시리즈는 조금 생소할 수 있는데, 쿼드로 등급의 그래픽 성능을 요구하는 전문가들에게는 HP의 Z시리즈와 델의 프리시전 시리즈와 함께 3대 워크스테이션 브랜드로 알려져 있습니다.
[ 마치며 ]
사실 씽크패드 시리즈에 대한 역사는 깊게 파고들면 책을 써야 될 정도로 내용이 많기 때문에 제가 아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요약을 해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법 글이 기네요)
혹자는 최신 씽크패드의 디자인을 "고리타분하다", 혹은 "이전 모델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짧다면 짧은 현대 IT기기의 역사 중에서 씽크패드 시리즈만큼 고유의 디자인 정체성을 유지한 제품이 또 있는지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그렇게 디자인으로 칭송받는 애플도 10~20년 전의 디자인을 보면 지금과는 완전히 달라졌을 정도로 IT 산업의 흐름은 빠르게 변합니다.
물론 씽크패드도 세월이 흐르면서 시대의 요구에 따라 디자인, 재질, 성능이 많이 변했지만 여전히 "탄탄한 검은색 바디에 빨간 포인트 색상"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은 높게 평가하고 싶습니다. 이건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씽크패드 디자인은 오래 써볼수록 가치를 알 수 있는 것 같아요. 화려하고 번쩍거리는 제품들과는 달리 질리지 않는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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